에페이로스 왕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페이로스 왕국은 고대 그리스 북서부에 위치했던 국가로, 기원전 370년 몰로소이인에 의해 처음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했다. 이 왕국은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로스 1세 시기에 이탈리아 남부로 원정하기도 했다. 피로스 왕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기원전 233년 왕가가 단절된 후 에페이로스는 에페이로스 동맹으로 재편되었으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기원전 167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에페이로스인들은 그리스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제우스를 숭배하고 도도나 신탁을 중요하게 여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에페이로스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 | |
기본 정보 | |
토착 이름 | |
일반적인 긴 이름 | 에페이로스 |
일반 명칭 | 에페이로스 |
시대 | 고전 고대 |
정부 형태 | 군주제 (기원전 330–231년) 연방 공화국 (기원전 231–167년) |
시작 연도 | 기원전 330년 |
종료 연도 | 기원전 167년 |
수도 | 파사론 (기원전 330–295년) 암브라시아 (기원전 295–224년) 포이니케 (기원전 224–167년) |
공용어 | 에페이로스 그리스어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통화 | 에페이로스 드라크마 |
역사 | |
시작 사건 | 에페이로스 부족들이 통합된 정치적 실체를 수립함 |
시작 날짜 | 기원전 330년 |
종료 사건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 공화정에 의해 정복됨 |
종료 날짜 | 기원전 167년 |
사건 1 | 피로스의 이탈리아 원정 |
날짜 1 | 기원전 280–275년 |
사건 2 | 군주제 폐지 |
날짜 2 | 기원전 231년 |
구성 민족 | |
민족 1 | 몰로시아인 |
민족 2 | 테스프로티아인 |
민족 3 | 카오니아인 |
지도자 | |
지도자 1 | 아이아키데스 |
지도자 2 | 피로스 |
지도자 3 | 네오프톨레모스 2세 |
지도자 4 | 피로스 |
지도자 5 | 에페이로스 동맹 |
지도자 칭호 | 왕 |
통치 기간 1 | 기원전 330–313년 |
통치 기간 2 | 기원전 307–302년 |
통치 기간 3 | 기원전 302–297년 |
통치 기간 4 | 기원전 297–272년 |
통치 기간 5 | 기원전 231–167년 |
2. 역사
2. 1. 선사 시대와 초기 역사
에페이로스 지역은 최소한 신석기 시대부터 해안을 따라 온 뱃사람들과 이들에게 그리스어를 전해준 내륙의 사냥꾼들과 양치기들이 거주했다.[39] 이들은 미케네의 무덤들과 유사한, 수혈 분묘과 포함된 커다란 봉분 속에 자신들의 지도자를 묻었으며, 이것은 미케네 문명과 이피로스 간에 오랜 접촉이 있었음을 나타낸다.[39] 상당한 미케네 유적지들이 이피로스에서 발견되었으며,[40][41] 특히 아케론강에 네크로만테이온 (죽음의 신탁소), 도도나에 제우스 신탁소 등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 종교 유적지가 발견되었다.[39][42] 또한 에페이로스는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아이톨리아, 아카르나니아를 포함한 다른 고대 그리스 지역들과 강력한 교류를 가졌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5]기원전 제2천년기 말 (대략 기원전 1100년-1000년)에 도리스인들이 이피로스와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를 침략했으며, 이들의 이주에 대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이피로스의 원주민들은 침입으로 인해 그리스 본토 쪽인 남쪽으로 밀려났고 기원전 제1천년기 초에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세 개의 주요 무리들이 이피로스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이피로스 북서쪽의 카오네스인, 중부 지역의 몰로소이인, 남부의 테스프로토인이었다.[43] 각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고유한 이름(카오니아, 몰로시아, 고대 테스프로티아)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래 이 지역 전체를 지칭하는 단일 이름은 없었다.
"본토" 또는 "대륙"을 의미하는 그리스 지명 ''에페이로스'' (에페이로스/Ήπειροςel)는 기원전 6세기에 밀레투스의 헤카타이오스의 저작에 처음 등장하며, 해양 지리적 관점에서 외부 관찰자의 시각에서 본 몇 안 되는 그리스 이름 중 하나이다. 원래 에페이로트인의 고유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이 지역의 주민들이 채택하게 되었다.[7]
2. 2. 몰로소이인의 확장과 에페이로스 왕국
몰로소이인계 아이아키다이 왕조는 기원전 370년부터 에페이로스에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려 했고, 경쟁 부족들과 희생을 치르며 그들의 세력을 확장했다.[44] 아이아키다이 왕조는 일리리아인들의 약탈에 대한 공동의 위협감에 맞서기 위해,[44] 빠르게 성장하는 마케도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8] 기원전 359년에 몰로소이인들의 왕 아리바스의 조카인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혼인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가 되었다.[45] 아리바스가 죽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숙부인 에페이로스의 알렉산드로스 1세가 에페이로스 왕위를 이어받았다.[45]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건너갈 때인 기원전 334년, 에페이로스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인근 이탈리아 부족들과 성장하는 로마 공화정에 맞서던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지원하러 남부 이탈리아 원정을 나섰다.[9] 전투에서 일부 성과를 거둔 후, 그는 기원전 331년 판도시아 전투에서 이탈리아 부족 연합에 패배를 당한다.[45] 알렉산드로스 1세가 죽은 기원전 330년에, 에페이로스라는 용어가 최초로 고대 그리스 기록에서 단일 정치 체계로서, 몰로소이인 왕조의 지도력하에서 나타났다. 그 뒤로 이피로스의 세 주요 부족들의 독자적인 화폐 주조는 막을 내렸고, 이피로스의 전승이 새겨진 새로운 화폐가 주조되었다.[46] 알렉산드로스 1세 사망 후, 그의 뒤를 계승한 아이아키데스는 카산드로스에 맞서 올림피아스를 지지했으나, 기원전 313년에 그는 퇴위당한다.[10]
아이아키데스의 아들 피로스는 기원전 296년에 왕위에 올랐다. 유능한 사령관이 된 피로스는 그리스계 타렌툼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섬에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압도적인 군사 능력을 지닌 에페이로스 군대는 헤라클레아 전투 (기원전 280년)에서 로마에게 승리를 거둔다. 그후로 피로스의 군대는 로마시 인근까지 이르렀으나, 보다 엄청나게 많은 로마군과 불균형적인 교전을 피하기 위해 퇴각했다. 다음 해 피로스는 풀리아 (기원전 279년)를 침공했고 피로스와 로마군 두 군대가 아스쿨룸 전투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에페이로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최초의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다.[47]
기원전 277년, 피로스는 시칠리아의 에릭스에 있는 카르타고의 요새를 점령했다. 이 행위는 나머지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도시들이 피로스에게 맞서도록 했다. 한편, 그는 시칠리아계 그리스인들에게 독제적인 행위를 보이기 시작했고 시칠리아인들의 견해는 그에게 분노를 나타냈다. 그가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하자, 그는 시칠리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48]
피로스의 이탈리아 원정은 불확실한 베네벤툼 전투 (기원전 275년) 이후로 끝이 났다. 군대 대부분을 잃은 그는 에페이로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최종적으로 이탈리아에 있는 그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값비싼 승리 때문에,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는 승자가 막대한 비용을 치러서 거둔 승리에 사용된다.[49]
2. 3. 피로스 왕과 에페이로스 왕국의 전성기
아이아키데스의 아들 피로스는 기원전 296년에 왕위에 올랐다.[46] 유능한 사령관이었던 피로스는 그리스계 타렌툼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섬에 공세를 시작했다.[47] 헤라클레아 전투 (기원전 280년)에서 로마군에게 승리한 후,[47] 피로스의 군대는 로마시 인근까지 진격했으나, 로마군과의 불균형적인 교전을 피하기 위해 퇴각했다. 기원전 279년, 피로스는 풀리아를 침공하여 아스쿨룸 전투에서 로마군과 격돌, 에페이로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다.[47]기원전 277년, 피로스는 시칠리아의 에릭스에 있는 카르타고의 요새를 점령했으나, 시칠리아계 그리스인들에게 독재적인 행위를 보여 시칠리아인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는 카르타고군에게 패배하고 시칠리아를 포기해야 했다.[48]
피로스의 이탈리아 원정은 베네벤툼 전투 (기원전 275년) 이후 끝이 났다.[49] 군대 대부분을 잃은 그는 에페이로스로 돌아갔고,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49] 그의 값비싼 승리 때문에,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는 승리자가 막대한 비용을 치러서 거둔 승리에 사용된다.[49]
2. 4. 에페이로스 동맹과 로마의 지배
기원전 233년, 아이아키다이 왕조의 마지막 생존자인 데이다미아가 살해되면서 에페이로스 왕가는 갑작스럽게 단절되었다.[50][14] 아카르나니아가 독립하고 아이톨리아 동맹이 암브라키아, 암필로키아 등을 점령하면서 영토가 축소되었지만, 연방 공화국 형태의 에페이로스 동맹이 성립되었다.[50][14] 새로운 수도는 카오네스인의 정치 중심지인 포이니케에 세워졌다.[50][14] 왕조의 몰락에는 아이톨리아의 압박, 마케도니아와의 동맹에 대한 반감, 사회적 긴장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50][14] 에페이로스 동맹은 각자의 의회(''시네리온'' 또는 ''시네드리온'')를 가진 연방 국가 형태로 유지되었다.[50][14]
에페이로스는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확장 정책을 펼치던 로마 공화정의 위협에 직면했다. 에페이로스 동맹은 처음 두 차례의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1]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년–168년)에서 몰로소이인들은 마케도니아 편을, 카오네스인과 테스프로토인들은 로마 편으로 분열되었다.[39][1] 전쟁의 결과는 에페이로스에 재앙과 같았다. 기원전 167년 몰로소이는 로마에 점령당했고, 15만 명의 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갔다.[39][1]
3. 사회와 문화
에페이로스인들은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남부 그리스의 폴리스 중심의 생활 방식과는 다르게, 주로 작은 마을에 거주했다.[51][52][15][16] 이 지역은 그리스 세계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수 세기간 아드리아 해안가와 내륙 지역의 일리리아인들과 분쟁을 겪는 변방이었다.[5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페이로스는 델포이 신탁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도도나의 신탁과 신전이 있어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53][16]
에페이로스인들은 북서 그리스어 방언인 에피로테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19][20] 대부분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했다.[19][20] 니콜라스 해먼드는 에페이로테스의 주요 사회 구조는 부족이었다고 주장한다.[21]
헤로도토스,[25]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26] 파우사니아스,[27] 에우트로피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은 에페이로테스를 그리스인으로 묘사했지만, 투키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들을 "야만인(바르바리)"라고 묘사했다.[29] 사이먼 혼블로워는 투키디데스가 에페이로테스에 대해 모호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언급을 한 것은 그들이 완전히 "바르바리"도 아니고 완전히 그리스인도 아니지만 후자와 유사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31]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나머지 그리스인들과 같은 신들을 숭배했으며, 최고 신은 제우스였다.[35] 도도나의 신탁은 그리스 전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35] 에페이로테스는 범헬레니 경기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인만 허용된 테아로도코이 목록에 포함되었다.[35]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도나 주변 지역을 고대 그리스의 일부이자 헬레네스가 기원한 지역으로 간주했다.[36] 플루타르코스는 피로스 왕의 전기에서 아킬레우스가 에페이루스에서 "아스페토스"(Ἀσπετὸςgrc, "말할 수 없이 위대한"을 의미)라고 불리며 신성한 지위를 가졌다고 언급했다.[37][38]
3. 1. 부족 사회와 생활 방식
에페이로스인들은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남부 그리스의 폴리스 중심의 생활 방식과는 다르게, 주로 작은 마을에 거주했다.[51][52][15][16] 이 지역은 그리스 세계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수 세기간 아드리아 해안가와 내륙 지역의 일리리아인들과 분쟁을 겪는 변방이었다.[5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페이로스는 델포이 신탁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도도나의 신탁과 신전이 있어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53][16]에페이로스인들은 북서 그리스어 방언인 에피로테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19][20] 대부분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했다.[19][20] 니콜라스 해먼드는 에페이로테스의 주요 사회 구조는 부족이었다고 주장한다.[21]
헤로도토스,[25]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26] 파우사니아스,[27] 에우트로피우스 같은 고대 작가들은 에페이로테스를 그리스인으로 묘사했지만, 투키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그들을 "바르바리"라고 묘사했다.[29] 사이먼 혼블로워는 투키디데스가 에페이로테스에 대해 모호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언급을 한 것은 그들이 완전히 "바르바리"도 아니고 완전히 그리스인도 아니지만 후자와 유사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31]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나머지 그리스인들과 같은 신들을 숭배했으며, 최고 신은 제우스였다.[35] 도도나의 신탁은 그리스 전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35] 에페이로테스는 범헬레니 경기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인만 허용된 테아로도코이 목록에 포함되었다.[35]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도나 주변 지역을 고대 그리스의 일부이자 헬레네스가 기원한 지역으로 간주했다.[36] 플루타르코스는 피로스 왕의 전기에서 아킬레우스가 에페이루스에서 "아스페토스"(Ἀσπετὸςgrc, "말할 수 없이 위대한"을 의미)라고 불리며 신성한 지위를 가졌다고 언급했다.[37][38]
3. 2. 종교와 신앙
에페이로스 왕국은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신들을 숭배했다.[35] 헬레니즘 시대까지 그리스 신들 외에 다른 신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35] 도도나 신전은 델포이 신전 다음으로 중요한 신탁소로 여겨졌으며,[35] 최고신은 제우스였다.[35]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도나 주변 지역을 고대 그리스의 일부이자 헬레네스가 기원한 지역으로 간주했다.[36] 플루타르코스는 아킬레우스가 에페이로스에서 신성한 지위를 가졌으며, 현지 방언으로 '아스페토스'(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할 수 없이 위대한/Aspetosgrc)라 불렸다고 언급했다.[37][38][60]3. 3. 그리스 문화와의 관계
에페이로스인들은 북서 그리스어 억양을 사용했으며, 금석학적으로 증명된 거의 대부분은 그리스식 이름을 지녔다.[19][20] 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스인으로 여겼고,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그리스 영웅들의 이야기(노스토이)와 다른 그리스 신화를 통해 맺어진 계보적 연결은 에페이로스와 나머지 그리스를 강력하게 연결했다.[23] 에페이로테스의 생활 방식은 해안의 코린토스와 코르키라 식민지보다 더 고풍스러웠지만, 그들의 그리스성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24]에페이로스인들은 제우스를 최고신으로 숭배했으며, 몰로시아인 지역의 도도나 신탁은 그리스 전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35]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도나 주변 지역을 고대 그리스의 일부이자 헬레네스가 기원한 지역으로 간주했다.[36] 플루타르코스는 아킬레우스가 에페이로스에서 신성한 지위를 가졌으며, 현지 방언으로 '아스페토스'(Aspetos, 호메로스 그리스어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하다는 뜻)라 불렸다고 언급했다.[60][37][38] 에페이로스인들은 범헬레니 경기와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테아로도코이 목록에도 포함되었다.[35] 기원전 360년에 편집된 에피다우로스의 신성한 사절 목록()에는 몰로시아인, 카소페인, 카오니아인 및 테스프로티아인이 포함되어 있다.[33][34]
헤로도토스,[25]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26][56] 파우사니아스,[27][57] 에우트로피우스[58] 같은 고대 작가들은 에페이로스인들을 그리스인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들을 야만인(바르바리)이라고 묘사했고,[54][29] 스트라본도 ''지리서''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55][30] 사이먼 혼블로워는 투키디데스의 이러한 언급이 에페이로스인들이 완전히 야만인도, 완전히 그리스인도 아니지만 후자와 유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31]
4. 20세기 이후
4. 1. 1913년 이후의 역사
5. 현대의 에페이로스
5. 1. 지리 및 행정 구역
6. 경제
6. 1. 개요
6. 2. 주요 산업
7. 인구
7. 1. 인구 구성
7. 2. 종교
8. 참고 문헌
참조
[1]
백과사전
Epirus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3-11-16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학술지
Liatovouni: a Molossian cemetery and settlement in Epirus
https://www.academia[...]
2010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PhD
Excavations of the Roman Forum at Butrint (2004-2007)
https://etd.ohiolink[...]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University of Cincinnati
2021-01-21
[21]
서적
[22]
서적
Greeks and Romans
https://books.google[...]
Springer
1983
[23]
웹사이트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1-07-07
[24]
서적
A Companion to Ancient Macedoni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1-07-07
[25]
웹사이트
Histories
http://www.perseus.t[...]
[26]
웹사이트
Roman Antiquities
https://penelope.uch[...]
[27]
웹사이트
Description of Greece
http://www.theoi.com[...]
[28]
웹사이트
Abridgment of Roman History
http://www.tertullia[...]
[29]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classics.mit.[...]
2011-08-05
[30]
웹사이트
Geography
https://penelope.uch[...]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Alternatives to Athens: Varieties of Political Organization and Community in Ancient Greec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35]
서적
Epirus, Four Thousand Years of Greek History and Civilization
Ekdotike Athenon
[36]
서적
[37]
서적
Parallel Lives: Pyrrhus
[38]
서적
[39]
웹인용
Epirus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3-11-16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기타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classics.mit.[...]
[55]
기타
Geography
http://penelope.uchi[...]
[56]
기타
Roman Antiquities
http://penelope.uchi[...]
[57]
기타
Description of Greece
http://www.theoi.com[...]
[58]
기타
Abridgment of Roman History
http://www.tertullia[...]
[59]
서적
[60]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